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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흙, 그리고 쉼"

예술과 공간의 대화,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에서 배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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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란 단순한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언어다.” - 조지아 오키프 [출처 국회도서관]

 

뉴멕시코의 붉은 사막과 거대한 하늘 아래, 조용히 숨 쉬는 한 미술관이 있다. 바로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다. 나는 그곳을 다녀온 적이 없다. 하지만 오키프의 작품과 그녀의 삶, 그리고 그 작품이 전시된 공간의 구조에 대해 글과 사진, 다큐멘터리를 통해 깊이 접한 적은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미술관이 낯설지 않다. 오히려 한 번도 발 디딘 적 없는 장소에서 어떤 진심이 내 마음속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 사막에서 피어난 색채의 시인

조지아 오키프는 "미국의 현대미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라는 수식어를 뛰어넘는다.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고, 마침내 감정을 흔드는 이미지의 향연이다.

거대한 꽃잎, 휘날리는 뼈, 텅 빈 대지와 깊은 하늘. 그녀는 본능적으로 "단순함 속의 극단"을 추구했다. 그녀의 눈에는 사막의 무채색조조차도 수백 가지 색으로 나뉘었고, 죽은 동물의 해골은 자연의 완성을 상징했다.

그녀의 시선은 항상 본질을 향했다. 피사체가 아니라, 그것을 감싼 ‘느낌’을 포착하고자 했다. 오키프가 추구한 이 시선은 결국 하나의 공간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바로 산타페에 자리 잡은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다.

■ 조용한 미술관, 깊은 울림

많은 미술관들이 웅장함을 뽐낸다. 긴 계단, 돔 천장, 대리석 벽과 금속의 광채. 그러나 오키프 미술관은 다르다. 그곳은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조용히 그 자리에 놓여 있다. 하늘의 빛과 흙의 질감이 그대로 벽을 타고 흐른다.

건축가는 이 미술관을 설계하며, ‘보여주는 것’보다는 ‘느끼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전시 공간은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의도적인 여백이 흐른다. 관람자는 그 여백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게 된다.

오키프의 그림은 그 공간에서 더욱 살아난다. 단순한 유화가 아니라, 하나의 기류처럼 방문자의 감정을 건드린다. 색채가 벽에서 바닥으로 번지고, 자연의 기운이 실내를 감싼다. 그림을 바라보다 보면, 그 앞에서 침묵하게 된다. 말을 하지 않아야 더 많이 들리는 곳. 그런 공간이 있다면, 바로 이 미술관이 아닐까.

■ 공간이 예술을 닮을 때

나는 이 미술관을 통해 하나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공간은 예술을 어떻게 품을 수 있을까?”

예술은 결국 감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공간 역시 인간의 삶과 감정을 담는 그릇이다. 미술관은 이 둘이 만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둘이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미술관은 너무 웅장해서 작품이 왜소해지고, 또 어떤 곳은 지나치게 의도적이라 작품보다 공간이 먼저 눈에 띈다.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은 이 균형을 조용히 맞춘다. 마치 예술과 공간이 오랜 대화를 나눈 뒤에야 겨우 이루어진 조율처럼, 그곳에는 강요 없는 감각의 흐름이 있다. 그림도 공간도 ‘크게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 건축이 전하는 메시지

사실 이 미술관의 전시 구조는 꽤 단순하다. 그러나 ‘빛의 설계’는 정교하다. 창문 하나, 틈새 하나에도 건축가는 오키프의 그림처럼 ‘의미 있는 여백’을 담았다.

햇빛은 시간에 따라 다른 각도로 들어온다. 아침에는 희미하게, 오후에는 직선으로. 그 빛이 그림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때, 관람자는 ‘시간’이라는 요소까지 함께 감상하게 된다. 이 얼마나 섬세한 설계인가.

또한 미술관 외관은 뉴멕시코 전통 흙집 양식을 따라 만들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오키프가 살아온 삶의 무대이자, 그녀의 미학을 형성한 풍경과의 연결고리다. 그녀의 예술은 그 땅에서 비롯되었고, 미술관은 그 사실을 잊지 않게 한다.

■ 공간을 만드는 이들에게

나는 이 미술관을 보며 우리 시대의 공간 창작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떠올렸다.

“공간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공간을 디자인한다. 카페, 갤러리, 작업실, 혹은 작은 집. 그 공간들이 단순히 ‘예뻐 보이는 것’ 이상을 담길 바란다. 누군가의 감정을 깨우고, 기억을 머무르게 하며, 예술을 경험하게 만드는 공간이 되길.

오키프의 미술관은 그렇게 ‘감정이 머무는 공간’을 보여준다. 그것이 비단 미술관이어서가 아니다. 그녀의 예술과 삶, 그리고 공간이 ‘진심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공간 하나쯤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한다.

■ 마무리하며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는 소리 대신 침묵이 있다. 격렬함 대신 깊이가 있다. 그녀의 미술관은 그 침묵과 깊이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나도 언젠가 그곳에 가보고 싶다. 그림보다 더 많은 말을 건네는 그 미술관의 ‘공기’를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다시, 내가 만드는 공간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

우리 각자의 일상에도,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공간 하나쯤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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